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차드 럿트 (문단 편집) == 생애 == 어릴 때 케임브리지셔에서 자랐고, 대학에서 이탈리아 문학을 전공한 리차드는 1951년 9월 29일에 부제품을, 1952년 9월 21일에 사제품을 받고 잠시 본당 신부로 사목하다가, [[세실 쿠퍼]] 주교가 쓴 체험수기 등을 보고 감명받아 1954년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여 오게 되었다. 리차드는 [[대학로성당]][* 당시 성 베다관] 관할사제, [[성공회대학교|성 미카엘 신학교]] 교수신부와 총장신부, 서서울지역 총사제 등을 역임했고, 휘문고와 서울대 대학원 등에서 영어영문학 강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66년에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마이클 램지 대주교로부터 대전교구 부주교로 지명받아 서품된다. 이어 1968년에는 코번트리로 떠난 [[존 데일리]] 주교의 후임 교구장으로 승좌하여 한국식 토착화 선교에 힘썼고, 충청지역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도 힘썼다. 대전교구장 시절에 이룬 가장 큰 업적은 교세 확장 등이 아닌 '''[[김삿갓]]의 [[시조(문학)|시조]]들을 발굴하여 세계에 알린 것'''[* 그는 연구결과를 모아 <민중의 해학시인 김삿갓>,,,(《한국 문학의 해학》, 국제문화재단, 1970),,,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이었고, 그 외의 한국 유명 [[시조(문학)|시조]]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선집을 내기도 했다. 또한, 지역문화재에도 관심을 크게 가진 그는 문화재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는 실태를 당시 문화공보부 등에 제보하였지만, 공무원들은 안타깝게도 그걸 무시했다고 한다. 1973년에 캔터베리관구에 사표를 내고 대전에서 평사제로서 활동하려고 했지만, 관구 측은 그걸 받고는 1974년 1월 15일 그를 [[트루로교구]] 보좌주교로 전격 전임발령내버렸다. 1974년 4월 18일 [[주한영국대사관]]에서 고별특강을 하고, 5월 8일 영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대전교구장 재임 당시의 한국문학사 연구 업적이 커서, 성균관대에서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줬고, 영국과 한국 양국에서 모두 훈장을 줄 정도였다. 트루로교구에서는 콘월 지방의 풍습과 콘월어를 열심히 공부하였고, 나중에는 [[콘월어]]로 혼배성사를 주례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79년에는 [[레스터교구]]장 주교로 승좌했고, 이 때부터 안정적인 환경에서 사목과 학문 연구에 더욱 정진했다. 레스터교구장 재임 당시 했던 대표적인 연구로는 [[구운몽]] 연구나 [[주역]] 평역 등이 있고, [[제임스 게일]] 목사가 저술한 <한국인의 역사>[*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1927(초판), 1972/1983(개정)] 개정판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2년에 영국[[감리회]]와 잉글랜드 성공회의 통합과 관련된 내부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지며, 본격적으로 고교회적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미 [[대전교구장]] 시절부터 성공회 주교들은 잘 쓰지 않는 주케토를 쓰는 등 고교회적 성향을 드러냈다.] 1984년에는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로버트 런시]] 대주교의 특사로 파견되어 [[김성수(주교)|김성수]] 주교의 서품식을 주례하기도 했다. 1990년에 은퇴하여 콘월 지역에 머물던 그는, 1993년 캔터베리관구에서 여성 사제를 서품하기로 결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1994년 [[천주교]]로 회심, 1995년에 천주교 사제로 재서품받는다. 그 이후로 천주교 플리머스교구의 원로사목자로서 사목했고, 2009년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부터 [[몬시뇰]] 서임을 받은 뒤, 2011년 선종했다. 선종 후 그가 남긴 유품과 연구자료들은 영국 각지의 도서관과 교황청, [[천주교 서울대교구]]청 등에 소장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